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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 집단이주의 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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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고리 집단이주의 비운

 

글의 제목을 ‘고리 집단이주의 교훈’이라 했다가 이건 아니다싶어 ‘고리 집단이주의 비운’으로 고쳤다.

교훈이라 해도 그런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이고 보면 아무래도 슬픈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살던 곳에 대해 말문을 연다한들 그리움은 고사하고 한만 서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글이 어쩌면 한에 찬 마을사람들의 맘을 담았기에 뜻이 배가될지도 모른다.

지난날을 돌이켜보지만 고리가 그런 곳이었냐며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고리는 어떤 곳인가. 조선시대, 미역이 진상되고 조세부담을 위해 마을이 세자궁에 속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황금어장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고리는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명소가 많아 유서가 깊다. 이런 마을에 나라의 경제개발이 화두였던 반세기 전, 어느 날 느닷없이 원전이 들어서게 됐다.

원전의 건립은 우리나라에선 이곳이 첨이다. 뿌리가 깊은 마을사람들은 귀신에 홀린 듯 했다. 그러다가 녹록치 않은 보상이 이뤄졌다.

현금을 거머쥐다 보니 눈이 휘둥그레지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국가사업에 협조를 해야 한다면서도 쥐꼬리와 같은 보상에 불만이 많았다.

턱없는 돈으로 떠나라니 사람들이 술렁거렸고 투덜댔다. 어업의 의존도가 높았던 부촌을 두고 떠나면 용돈과도 같은 돈으로는 살기가 어렵다는 여론이 빗발쳤다. 사람들은 실의에 빠졌고 그러다보니 철거에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개발의 신호탄인 트랙터가 들이닥쳤다.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신작로에 있는 공터에 모여 웅성거렸다. 이 금액으론 안 된다며 한탄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동태를 살피러 비밀정보요원과 경찰들이 설쳐댔다. 마을사람들은 주눅이 들어 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자리를 뜨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얼마 전, 이웃마을의 한 유지가 원전건립을 반대하다 모처에 끌려갔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세한 동민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들은 말께나 하는 사람이 나서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막상 모여서도 앞장서서 열변을 토하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요즘처럼 표현의 자유가 없었고 촛불시위와 같은 시위문화도 없었다. 가라면 가야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디로 갈건 데’가 인사였다. 며칠이 지났다. 어차피 갈 수밖에 없다고 체념했는지 마을사람들의 발길이 바빠졌다. 봇짐을 실은 트럭이 연이어 들락거렸다. 

개별 이주가 시작되고 집단이주가 뒤를 이었다. 집단이주는 공교롭게도 둘로 쪼개졌다. 한쪽은 인근의 동쪽으로, 다른 한쪽은 바다 건너편으로 갔다. 동으로 간 마을은 다시 신고리원전에 위해 철거됐음으로 언급할 필요가 없어졌다. 바다 건너편에 간 마을은 기존의 마을에 터를 잡았지만 입주 순간부터 본동 사람으로부터 눈총을 맞아야만 했다. 소위 말해서 텃세였다. 왜 하필 우리 마을에 왔느냐다. 사람들마다 눈을 흘겼다. 살던 곳에선 떠밀렸고 이주지에선 냉대를 받아야만 했다. 

우리가 새터민이라도 되나. 이주민도 본동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었다. 너희 마을이라 하여 철거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고 말이다. 세상의 일은 역지사지가 아닌가. 나라에 의해 철거됐을 뿐인데 같은 지역에 살면서 이럴 수가 있느냐는 게 이주민들의 항변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리의 집단이주는 시기적으로 묘했다. 줄잡아 5년 뒤에만 철거돼도 이런 괄시는 없었을 것이다. 이주민들은 가는 곳마다 차별을 받았다. 겨우 어렵게 자리를 잡았으나 지금의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부지가 적어 길도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길밖에 낼 수가 없었다. 이주민들이 부지를 넓히려 애를 썼으나 땅을 파는 사람이 없었다. 

이주민들은 집단으로 온 게 서러웠다. 여생을 정이 없는 이주지에서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객지생활에 잔뼈가 굵은 제주도 해녀들은 그다지 서럽지가 않았다. 어디서든 물질을 할 수 있어서다. 입주자들에게 씌워진 올가미는 철거민과 이주민이란 레테르였다. 마을을 떠날 땐 철거민이었고 이주지에 가자 본동의 사람들은 이주민이라 불렀다. 이주민이란 말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이름에 대한 강박관념이 늘 이주민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고리집단이주의 걸림돌은 자연산 미역의 상징인 곽암이었다. 곽암이 집단이주를 가로 막았다. 미역돌이 있는 어촌은 다 그랬다. 텃세는 미역돌로 인해 생겼다. 당시만 해도 수산동식물의 서식처인 미역돌은 마을의 큰 재산이었다. 마을의 생존권이 달렸음으로 집단이주는 그들에게 있어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본동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나무랄 수도 없다. 

철거민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지만 고리가 1970년대의 중반에만 철거돼도 이런 냉대는 없었을 것이란 말이 빈말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양식산 미역의 붐이 일게 되자 갯바위의 값어치가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이주민들로선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고 보면 시기가 족쇄를 채운 셈이다. 

고리이주민들은 운이 없었다. 미역돌때문이다. 이주지의 마을 뒤는 지금도 골목길여서 차가 들어가지 못함에 따라 집 가치가 없다. 이주지도 미역돌로 인해 행정적으로 독립이 되지 못했다. 보상이 적어 개별이주를 못하고 택한 집단이주. 이는 많은 문제점을 남겼다. 국가의 책임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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