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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차원에서 바라본 미역양식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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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민간 차원에서 바라본 미역양식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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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민간 차원의 미역양식은 누구에 의해 이뤄졌을까. 난 2006년 기장군 지역의 향토지인 <일광면지(일광면지편찬위원회)>를 집필하면서 미역종묘배양과 양식은 부산 기장군 일광읍 학리 출신인 김용대(1938년생)가 최초였다고 기술했다. 책이 배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미역양식업의 최초는 김씨가 아니라는 말이 나돌았다. 내 딴엔 1년 남짓 면지를 만든다고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게 발목을 잡은 셈이고 보면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한번 출간된 글은 고칠 수는 없다. 나로선 아무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사과로서 끝날 일도 아니다. 내가 역사를 왜곡하다니 허탈했고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했다. 

 

난 글이 써진 당시를 회상해 봤다. 김씨로부터 양식 등에 관해 얘기를 들었을 땐 면지를 탈고할 무렵이었다. 그는 나에게 자기가 일군 양식업에 대한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진지함이 있었고 신뢰가 갔다. 늦었다고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칠 수가 없었다. 그의 진술만을 듣고 부랴부랴 작성하여 면지에 올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김씨로부터 직접 듣고 글을 썼는데 그럼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던가하고 그를 의심했다. 그의 인격으로 봐 거짓말을 할 분이 아니었다. 나는 지체할 수가 없어 그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그는 한사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난 이 일을 어떻게 매듭을 지을까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사실 미역의 양식이 1960년대이니만큼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의 일을 파헤친다는 게 간단치가 않다. 2006년만 해도 미역양식의 시초지는 일광읍 학리마을이고 시초인은 김씨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게 아니라는 소문이 일자 면지를 불신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기장군이 이동마을에다 표지석을 설치하기 위해 추진위원회를 구성, 2011.2.18 및 2011.2.28 관계자와의 회의를 거쳐 결의를 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미역양식업자가 있는 곳이 학리가 아닌 이동마을이란 이유에서다. 나로선 기가 찼다. 기장군이 미역양식에 따른 표지석을 설치한다했을 때만 해도 나 역시 추진위원의 한 사람이었다. 기장군이 나를 향토사학자라며 위원으로 위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지석의 설치가 학리가 아닌 이동마을이란 말이 있은 데다 기장군이 <일광면지>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와 김씨가 기장에 살고 있었음에도 사전에 만나 경위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일방적인 회의에 참석할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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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경위나 알자며 회의 때 내놓은 기장군의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봤다. 수산양식개발사, 근대한국수산사, 미역신발육종연구 등이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연구기관에서 나온 참고자료일 뿐 민간차원의 종묘배양 및 양식과는 별개임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나를 어리둥절하게 한 것은 1978.7.13자 <동아일보>의 기사였다. 이에 의하면 ‘기장미역은 1965년 방현호, 송병효, 김용대 등 3인에 의해 양식이 이뤄졌다.’라고 돼있었다. 이 기사는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등 육하원칙이 결여돼 사실규명의 근거자료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송씨와 같이 사업을 한 방씨의 경우, 본인 스스로 1965년이 아닌 1967년부터 미역양식을 했다라고 기장군의 자료에 그렇게 돼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도 뒤늦게 알고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소명에 나섰다. 그의 주장을 들어본다. 그는 1965년경 자비로 학리 지선의 육상(현 학리 260-1)에서 50여 평의 미역종묘배양장을 설치한 다음 학리마을의 자연산 돌미역귀를 채취, 여기서 배양된 종묘를 새끼줄에 부착시켜 1966.2 학리앞 해상에서 양식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자기가 원조임을 강조했다. 

그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2011.7.29 당시 경상남도 수산국장이던 김태우(작고)로부터 1965~1966년 미역양식에 성공하였다는 사실확인서를 징구, 이를 기장군에 제출함으로써 그의 행적이 백일하에 밝혀졌다. 

 

뿐만 아니다. 그는 2021.11.12 미역양식의 역사적인 정립을 위해 수산진흥원 출신인 정덕영과 동래군 수산과 출신인 박귀의를 그의 증인으로 신청하였고 기장군이 이들과 면담을 했는데 이에 의하면 ‘1965~1967년까지 김씨가 일광읍 학리에서 가이식 연구, 종묘배양장 건립, 본 양식시설 시도, 미역종묘배양 등의 연구를 한 사실이 있었으며 1967년 당시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농어촌소득증대장려사업의 일환으로 기장수협 4개 어촌계(동백, 이동, 이천, 대변)와 어업인 등에게 김씨가 배양한 미역종사를 일괄 구입후 지원하여 미역양식산업화에 기여한바가 크며 기장군 관내에서 개인으로선 첨으로 미역종묘생산, 가이식, 본 양성연구 등을 통해 성과를 이룬바가 있고 이를 통해 얻은 미역종사를 지역보조사업을 통해 관내 타 어업인들에게 분양 후 대량 양식에 성공, 기장군 미역양식의 민간산업화에 크게 기여하였다,’라고 함으로써 김씨의 행적은 기장군에 의해 입증이 된 셈이다. 

 

 

늦었지만 이로서 진실이 밝혀졌다. 김씨가 가지고 있는 1965년 찍은 미역종묘배양장 사진, 1966년 경상남도 수산국장 등 현지 방문 사진, 1966년 양식된 미역 사진 등은 양식미역의 발자취를 찾는데 있어 크나큰 근거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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