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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지 칼럼] 익숙하지 않은 것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칼럼리스트 유은지> 일간의 연수에 참여하기 위해 찾은 천안은 들이쉬는 공기마저 새롭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아침부터 서둘러 KTX에 올라탄 피로감은 가시지 않았지만, 참여해야 하는 스케줄과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면서도 설렘으로 다가왔다. 숙소 인근에 독립기념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어린 시절 부모님 손에 이끌려 왔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아주 낯선 곳은 아니었다는 생각에 천안이라는 도시가 조금은 친근하게 다가왔다. 바쁜 일정을 쪼개어 참여한 연수지만, 산자락에 위치한 연수원 덕분에 자연 속에서 복잡한 마음을 잊고 전환점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익숙했던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 닿으면 또 다른 시야가 펼쳐지니 말이다. 첫날은 비가 계속 내렸는데, 이튿날 아침 창문을 열어보고 창밖의 풍경에 환호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평소 자주 볼 수 없었던 가득 쌓인 하얀 눈을 보고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밖으로 나와 쌓인 눈을 밟으니 즐거운 마음에 들떴고, 차가운 공기는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이런 것이 낯선 곳에서 즐길 수 있는 매력이지 않나 싶다.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는 과정은 정해진 행동을 하면 되었다.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일정 후 점심, 그리고 오후 수업에 참여하고, 저녁식사 후 함께 한 룸메이트와 수다를 떨다 일찍 잠이 들었는데,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규칙적인 생활을 어쩔 수없이 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불편함이 더 많을 것 같았던 시간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흘러갔고, 서로가 처음인 사람들과 소통하고,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다. 만약, 이러저러한 핑계로 연수를 미루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순간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성취감과 자신감을 회복하고 삶의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도록 하는 것, 이는 새롭게 언어를 배우는 것만큼이나 또 다른 경험을 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이점일 것이다. 조금은 고립된 환경이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고, 처음 접하는 용어와 내용을 학습하는 과정은 또 다른 전환점을 갖게 해준 것은 분명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첫날과는 달리 연수의 마지막 날은 어색함보다는 더 자연스러워진 관계로, 처음보다는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의 힘이 생겼으니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워진 기분이다. 첫날 KTX를 타고 천안행을 향할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으로 다시 일상으로 복귀를 했다. 언제 다시 부풀었던 감정이 가라앉을지는 모르겠지만, 익숙함을 벗어났던 경험은 조금 더 나아가 보겠다는 용기와 어려운 상황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새로운 경험으로 확장된 마음은 결코 예전 차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 - 올리버 웬델 홈스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경험은 행복하고 즐거운 것일 수도 있고, 괴롭고 힘든 것일 수도 있다. 또는 그 중간일지도 모르지만 시도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바쁜 일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여행이 되어도 좋고, 익숙하지 않은 공간으로 자신을 던져보는 것도 삶의 가능성을 좀 더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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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호 노을전망 무장애 데크로드를 걷다”참샘진주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에서(이하 참샘진주IL센터)는 28일(수) 장애인편의시설 조성활동의 일환으로 진양호 노을전망 데크로드를 방문하였다. 이번 장애인편의시설 조성활동은 장애인 당사자로 구성 된 참샘진주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 편의시설조성단과 장애인직업재활시설 사랑그림숲의 장애인 근로자 및 수곡면 무장애도시위원회와 함께 진양호 노을전망 무장애 데크로드를 걸으며 장애인이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였다. 데크로드는 단차가 없어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도 어려움 없이 이용할 수 있었으며 폭 역시 휠체어와 사람 한 명이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데크로드 중간에 마련된 전망대에서는 진양호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었다. 진주시는 진양호공원 내 아천북카페에서 상락원 뒤편 팔각정까지 1.8km를 잇는 진양호 노을전망 데크로드를 조성할 계획이다. 현재 완공된 구간은 1구간으로 연내에 2, 3구간이 완성될 예정이다. 진양호 노을전망 데크로드는 진양호와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무장애 숲길로 무장애 총 628m 구간이 무장애 데크로드로 조성되어 있었다. 참샘진주IL센터 정영춘 소장은 “지역 내 장애인에게는 좋은 힐링 산책로가, 진주를 찾는 장애인 방문객에게는 무장애 관광지가 될 것이라 기대된다.”며 “진주시의 무장애 편의시설 조성을 통해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여가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어 장애인의 사회참여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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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마루 사치코의 행복 씨앗】 말이 만드는 미래<주오대학교 교수 리키마루 사치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이 속담은 내가 한국어능력시험을 위해 공부했던 시절 배운 속담이며, 특별히 마음에 드는 말이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이 말을 들으면 행복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같은 뜻을 일본어로 하면 “파는 말에 사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나쁜 말을 먼저 한다면 상대방도 나쁜 말을 쓰며 대답한다는 부정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한국 속담은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더 하나의 이유는 “고와야”라는 표현을 위해서다. 일본어로 “고와이"라는 말이 있다. 무섭다는 뜻이다. “곱다”는 단어는 “무섭다"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들을 때마다 무섭다고 들리는 이 말이 재미있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다시 이 속담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속담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기사도 당연히 있었지만 그 이외에 현실은 아 속담이 하고 싶은 내용과 무척이나 다르다는 기사도 많이 나왔다. 대화할 때 상대방은 나와 다른 사람이라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을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그럼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어떨까? 고은미 작가와 김정호 작가가 쓴 책《말의 알고리즘》에 따르면 인간이 말을 할 때 가장 먼저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한다. 그래서 부정적인 말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된다. 끊임없이 부정적인 바다 속에 나를 넣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말만 늘 하고 듣는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자신에게 계속 "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설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근에 비약적으로 발전된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뇌가 더 이상 노력하는 것을 그만둔다고 한다. 반대로 자신에게 긍정적인 말을 늘 걸린다면 그것은 나를 늘 칭찬하는 것이다. 칭찬을 받으면 누구나 기쁘다. 더 노력하려고 한다. 칭찬에 만한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성공한 체험이 쌓으면 자존심도 높인다. 그것은 잘 알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서 칭찬하기는 어렵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말할 때라면 어떨까? 아마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그 사람이 더 기분 좋게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아서 칭찬을 하는 것이 아닐까? 매일 아침에 거울 안에 있는 나를 보며 긍정적인 말, 즉 나에게 칭찬을 하는 것은 큰 효과가 있다고 한다. 거울 안에 있는 나는 나 자신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처럼 느낀다. 실은 나는 거울 안에 있는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을 불편하다. 다만 요즘 자기 모습을 영상 속에서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동영상을 만들어 SNS에 정기적으로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지만 시점의 이동은 우리에게 상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면 자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책《퓨처셀프》(벤저민 하디 저/ 최은아 번역)에서도 미래의 나와 대화할 때 그 “나"를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타인처럼 생각하라는 조언이 있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면 현재도 미래도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를 다른 사람처럼 보고 나에게 칭찬하기. 처음에는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미래에는 확실하게 변화가 생길 것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이 말은 원래 인간관계를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하지만 자기자신과 더 사이좋게 살아가기 위해서도 유용하다. “가는 말이 아름다워야 올 미래는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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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 힘 좀 빼고 살아도 괜찮아얼마 전, 독서 모임에서 책에 대한 나눔을 하던 중, 한 분이 자기가 그동안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살고 있었음을 몰랐었다고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매주 경락을 받으며 전신의 근육을 풀고 오지만 다음 주면 근육이 뭉쳐져 있다고 했다. 경락을 해 주시는 분이 궁금해서 물어볼 정도였음에도 정작 자신은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이를 악물고 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온몸에 힘을 주고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한다. <출처: 픽사베이> 온몸에 힘을 주고 살면서도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긴장된 상태로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내 손을 나도 모르게 꽉 움켜잡고 있을지 모른다. 꽉 움켜잡고 있는 것, 그것은 손이 아니라 살면서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즉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하는 작은 일부터 인생의 큰 목표와 지키고 싶은 가치관 등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것들일 것이다. “당신은 왜 가슴에 중압감을 느끼는가? 이 질문에는 표준 정답이 있다. - 자신을 너무 압박하고 있거나, 목표가 이뤄지기만을 안달하며 기다리고 있거나, 뭔가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힘을 빼라. - 리얼리티 트랜서핑, 바딤 젤란드 누구나 자기만의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이 있다.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해 우리가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면 누구보다 더 잘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한때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과감히 습관도 바꾸고 부족함을 느끼는 것을 채우며 살았다.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사소한 일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우리는 잘하고 싶고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게 되면 균형이 깨져 버린다. 붙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놓치게 된다는 말처럼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면 의도와는 다르게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날 때가 많다. 왜 그런 결과가 나올까를 생각해 보면 내게 주어진 어떤 일, 목표, 가치관이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에 실수나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이 경직되면 작은 실수에도 좌절하고 쉽게 포기하기도 하며 다시 시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살면서 깨우치는 것 중의 하나가 있다면 앞만 보고 달린다고, 매일 자신에게 힘내라고 속삭인다고 우리가 원하는 삶에 빨리 닿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한 발 짝 물러나 살짝 힘을 빼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실수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실패했을 때를 한 번쯤 상상해 보는 편이 훨씬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다. 실제로 나는 가끔 어떠한 일을 할 때 잘못되었을 때를 그려본다. 과연 잘못되었을 때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두려움이 사라지고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낀다. 힘을 좀 빼고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의 시대가 치열한 생의 현장으로 우리의 등을 떠밀어도 너무 힘주어 살지 말자. 그 힘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음을 깨닫고, 생각의 유연함을 기르고 시야를 넓히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힘을 빼고 세상을 바라볼 때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으며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냥 힘 좀 빼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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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마루 사치코의 행복 씨앗】 시선을 맞추는 상대방<주오대학교 교수 리키마루 사치코> 꿈을 갖고 살자! 미래의 목표를 세우자! 주변에서많이 듣는 말이다. 나도 이런 말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고 싶은 일이 많을 나에게 흥미로운 일들을 하나씩 실현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하는 것은 다 할 수 있는 것이라는 프랑스 속담(Vouloir, c’est pouvoir)를 좋아하고 노력, 도전, 열정이 내 키워드였다. 즉 나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던 것이다. 그런 내가 “꿈을 10배, 100배 더 크게 상상하라" 라는 구절에 마음이 끌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읽은 책《내면소통》안에서나는 이런 표현을 만났다. 나는 관찰 대상이 아니라 행위의 주체이다. 그래서 갖고 있는 물건이나 지위가 없어도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란 존재는정의할수 없는 “공 (空)”이고 그런 나에게 중요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서" 다. 《내면소통》저자에 따르면 인간들이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한 계기는 농업사회가 형성된 시기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 전에 사냥・채집 생활을 했을 때는 먹는 것이 내일, 내년도 똑같이 있을지 모르기에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못 했었다. 사냥・채집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서 식으로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계획 세우기가 가능하게 되기에 오히려 미래에 관해 걱정거리가 생긴다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신념이 무너져 가는 느낌이었다.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맞는지, 오히려 지금, 여기서 집중하며 사는 것이 맞는지, 확실한 시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면 혹시 이 두 가지 관점에는 공통점이 있는가? 며칠 동안 고민해 봤더니 내가 주로 미래를 보며 살고 있었고 현재는 다만 통과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깨달았다. 물론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 매일 노력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에게 현재는 특별히 인식 가능한 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나의 사고방식에 대해 인식을 할 수 있던 뿐이며 의문이 아직 남아 있었다. 초점을 맞추는 시기가 미래인지, 현재인지라는 의문이다. 그에 관해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하며 읽은《여덟 단어》속에 나온 어느 구절이 나의 눈길을 끌렸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표현이다. 원래 니체 말이며 일생은 우리가 창조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네 인생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내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란 틀림없이 이런 운명을 갖고 있는 나를 사랑하기도 한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현재의 나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노력해야 한다고 다양한 것을 배우고 왔다. 동시에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도 내 안에 있었다. 내가 비관적 낙관주의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나에 불만이 있으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도 나를 100% 사랑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 인생, 나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현재의 나, 매일 살아가는 한 순간, 한 순간을 소중하게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 여기서"를 해석하면 꿈을 갖고 사는 인생과 모순되지 않는다. 삶에 목표가 있으면 피터 프랭클처럼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갈 힘을 얻는다.다만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때까지 걸어가는 하루하루는 그냥 차 창문 밖에서 지나가는 풍경이 아니라 시선을 맞추는 상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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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지 칼럼]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유은지 칼럼리스트> 네이버 검색창에 주로 검색한 내용을 살펴보다 불현듯 웃음이 나왔다. 한 주간 자주 살펴본 단어는 어깨 마사지, 통증 완화와 관련된 검색어가 주를 이루었는데,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제품도 있었다. 목과 어깨 통증이 쉽게 사라지지 않아 생활에 불편함이 있었는데, 스트레스로 인한 근육의 긴장으로 생겨난 통증일 가능성이 높았다. 긴장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하는 목표와 성과들이 즐거움과 설렘보다는 부담으로 와닿는 중임을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외적 동기와 내적 동기를 주로 사용하게 된다. 만약, 자신이 어떤 동기에 반응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면, 무엇인가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좀 더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일반적으로 외적 동기는 금전적 보상, 명예, 평가와 같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동기를 의미하며 내적 동기는 즐거움, 몰입감 등을 말한다. 취미생활 등 무엇인가에 푹 빠져서 몰입하는 사람들은 내적 동기가 강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 지표들을 추구하게 되고, 후자는 행위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자신이 어떤 동기가 강한 사람인지를 말이다. 목표에 대한 결과가 예상처럼 따라오지 않더라도 그 과정 자체의 즐거움을 즐기는 사람인지 아니면, 목표 이후에 외적인 보상이 함께 할 때가 더 능률이 오르고 좋은 사람인지를 말이다. 외적 동기가 강할수록 괜찮은 결과가 따라오지 않으면 어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흥미를 잃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사회생활 속에서, 즐거움과 몰입감 등을 발휘하여 매 순간 일하는 것은 쉽지 않은 듯하다. 나를 돌아보아도 내적 동기도 중요하지만 외적 동기도 무척이나 중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보상과 평가가 강조되는 사회이지만 개인의 내적 동기를 발휘하여 행복감을 찾을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는 과정은 필요한 것 같다. 이루려는 목표를 위하여 열심히 나아가는 과정은 중요하지만, 보상과 성공에만 몰입한 목표는 그 목표가 달성되지 않았을 때 훨씬 더 큰 상실감을 경험하게 되니 말이다. 그러므로 작게라도 스스로가 즐길 수 있고 행복한 목표들을 조금씩이라도 가지게 된다면, 더 좋은 결과의 삶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한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어깨 통증은 최근에 마주한 여러 목표와 성과들이 스스로 이끌어낸 동기보다, 상황에 의해서 만들어진 동기에 의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떤 동기를 추구하는 것이 좋은가. 옳은가는 말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원동력을 이끌어 내는 동기에 대해 한 번쯤은 고려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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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나는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면 거울을 보며 그 속에 비친 나에게 웃어주기도 하고 얼굴을 두 손으로 꼭 감싸고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삶의 고민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날엔 나도 모르게 한껏 심란한 마음으로 멍하니 보게 된다. 또 어떤 날은 사는 게 한없이 즐거운 사람 마냥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 하루하루가 다르게 느껴지지만 “○○야, 사랑한다.” 라는 말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삶이 힘들어도, 사는 게 즐거워도 언제나 나를 사랑함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을 책과 각종 매체를 통해 쉽게 접하고 있다. 행복한 삶도, 자존감을 높이는 것도, 마음의 평온도 자기를 먼저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사랑을 하는 것일까? 아니다. 자기 사랑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우리의 인생이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 - 루이스 L. 헤이 나는 나를 정말 사랑하고 존중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가 하는 사랑은 지극히 이기적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예를 들어, 예전보다 살이 붙은 내 모습을 볼 때면 짜증이 스멀거리며 올라와 쳐다보기도 싫었고, 여전히 주변의 비판이나 평가에 쩔쩔매는 내 성격도 참을 수가 없었다. 안 그런 척하는 것뿐이었다. 스스로 생각했을 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다 부정하고 외면하며 나를 사랑한다는 착각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이렇게 변하면, 무엇을 하지 않으면 너를 사랑해 줄게.”라고 강요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자기사랑은 조건이 붙을 수 없는 사랑이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결점을 가졌든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괜찮은 모습의 나를 찾아 그 모습만 보여주려는 것을 멈추고 지금 나의 모습을 그저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사람은 관점이 바뀌면 생각과 행동도 달라지게 되어있다. 나를 힘들게 했던 고민은, 단순히 살을 빼겠다는 목표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위해 관리가 필요함을 깨닫고, 적절한 행동들을 삶에 적용해 나가면 될 것이고, 타인은 의외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음을 깨닫는다면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 깨닫는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나의 몸과 마음이 부족하다는 결핍의 관점에서 벗어나 지금 있는 그대로 충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 사랑이다. 혹시 외면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있는가? 그것은 부정하고 외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꼭 안아주어야 할 또 다른 나의 모습이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 속의 나를 대면하듯이 과연 내 사랑은 어떠한가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선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그날의 모든 것은 사랑으로 빛날 것이다.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세상의 모든 사랑도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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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마루 사치코의 행복 씨앗】시선의 이동<주오대학교 교수 리키마루 사치코> 지난 주말은 올해 구정이었다. 한국, 중국 뿐만이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 있는 많은 나라에서 구정을 축하하지만 일본에서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1868년에 개국한 일본은 1872년11월9일에 유럽형의 달력을 도입할 거라고 결정해, 그 결과 동12월2일의 다음 날을 1873년1월1일이 되었다. 갑자기 달력까지 바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근대 국가가 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을 모방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정부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일본의 개국 전 에도(江戸) 시대 (1603-1868)에 있었던 무사들 가운데, 개국 이후 관리가 된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들에게 정부는 월급을 지불했어야 했는데 이것은 큰 부담이었다. 또 신력이 도입된 다음 해는 태음력이라면 윤달 6월이 생겨, 정부는 13개월분의 월급을 지불해야 할 입장이었다. 이 부담을 피하기 위해 11월에 갑자기 달력을 바꾼 것이다. 게다가 그 해 12월이 2일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부는 그들에게 12월 월급을 지불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정부는 2개월치 월급을 지급하지 않는 데 성공한 것이다.그러나 국민들의 곤란을 피하기 위해 정부는 한동안 달력에 태음력 날짜도 기재되는 방법을 해결책으로 선택했다. 농사, 어업 등 당시의 주요 산업과 태음력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 주도로 근대화가 점점 진행되어 결국 1910년 태음력 날짜는 달력에서 삭제되었다. 이 사실을 일본 국민들이 태음력 폐지라고 인식하여 일본사회에서도 점점 신정 설날만 축하하기로 하였다. 이 변화에 관해, 일본에서 구정을 축하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신정 설날에 이 습관이 이동한 뿐이라는 설명을 하는 학자도 있다. 일본에서 구정을 더 이상 축하하지 않게 되었다는 견해가 대부분인 가운데 이러한 발상은 나에게 깨달음을 준 것이었다. 바로 생긴 일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에 따라 보이는 사실도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도 일상생활을 하며 안 좋은 일이나 힘든 일들도 반드시 만나게 된다. 그럴 경우 나쁜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면, 나쁘다고 느꼈던 일조차도 좋은 일로 전환될 수 있다. 또 그 일을 타인의 시점으로 보는 것도 유용할 수 있다. 이런 질문방법은 라이프 코칭에서 자주 쓰이는 방법이다. 상담자가 고민하고 있을 점에 대해, 예를 들어 상사였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배우자라면 어떤 느낌이 들 것인가? 등 질문을 하며 상담자의 고민을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보아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가도록 유도하는 방법이다. 인간은 특히 문제점이 있을 때 그 문제를 자신의 시각으로만 보는 경우가 많다. 힘들 때 문제점에 집중하는 태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시점을 조금 이동해서 생각한다면 같은 일이라도 다르게 보인다. 일본에서는 더이상 구정을 축하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신정 설날에 행사가 이동된 것 뿐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처럼 시점을 이동해 조금 멀리서 문제를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면, 시각이 넓어지고 해결책도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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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지 칼럼] 어떤 질문이 필요한가.<유은지 칼럼리스트> 살다 보면 불가항력이라는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 나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무기력감과 허탈감이 몰려오지만, 동시에 복잡한 생각들이 뒤섞인다. 이럴 때, 몇 번의 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다 보면 어느새 삶의 여러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불가항력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나아가기 위해 질문을 하는 듯하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답을 내려야 하는 질문들이 있고 각자가 처한 상황과 역할에 따라 가지고 있는 질문은 다양하다. 나 역시도 그러한데, 최근에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가야 할까. 나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에 대한 여러 질문들이 오고 갔었다.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듯이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질문에 집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은 평생을 끊임없이 질문했고, 그 결과는 인류 문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아인슈타인처럼 위대한 업적을 만드는 질문하기는 쉽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에는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질문이 있어야 주도성을 가지고, 자신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테니 말이다. 오늘 하루 어떤 질문이 가장 많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택시를 탈까. 커피를 마실까.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친구를 만날까.’와 같은 순간의 충족을 위한 질문의 연속이었는데 문득, 좀 더 내 삶에 유용한 질문이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 생겼다. 우리는 질문을 통해 성장을 하기도, 생각을 바꾸기도, 관계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좋은 질문이 무엇인지 좀 더 생각 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어제와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 마주할수록 우리는 보다 큰 질문을 하게 된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왜 그러고 싶은가.” 와 같은 좀 더 넓은 질문을 하다 보면, 마주했던 상황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질 때가 있다. 유용한 질문들을 통하여 스스로의 삶에 답을 조금씩 만들어가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에게 묻는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왜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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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리스트] 관계가 스트레스가 되지 않으려면“어디니?”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지인이 던지는 첫 마디는 변함이 없다. 짧은 순간 어떤 대답을 할까 망설이게 된다. “어디니?”라는 말에는 “난 지금 너의 시간이 필요해.”라는 의미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함께 공유한 세월만큼이나 가족보다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 세월 때문이었을까 지인은 늘 자신의 시간에 나를 마음대로 끼워 넣으려고 했던 것 같다. 갑자기 시간을 내라는 말에 바쁘다는 나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했고, 자신의 시간에 맞춰주기를 원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궁여지책으로 핑계를 대곤 했었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이 시기를 떠올릴 때면, 나는 왜 소극적으로 피하기만 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오히려 미안함을 느끼기까지 했으니, 나를 인정해 달라거나, 적당히 거리 두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살다 보면 수많은 관계가 맺어질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지속하는 관계들은 함께 즐겁고, 함께 성장해 나가며 서로 좋은 영향을 끼친다. 물론 모든 만남이 저울로 재는 것처럼 균형을 맞출 수는 없지만 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관계 앞에 위기가 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막심 만케비치의 <소울 마스터>에는 “<이 사람>이 아니라 <내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당신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하고 의도한 대로 살기를 바라며, 그런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이다. 그런데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 내 시간을 마음대로 쓰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한 존중과 신뢰는 아름다운 관계의 첫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으며 소유 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란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관계에는 적당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상대가 원하지 않는 선은 넘지 않는 예의는 지켜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가 좋은 영향을 나누고, 긍정적이며 성장하길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를 위해서도 거리 두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과목이라생각한다. “어디니?”라며 전화를 하던 지인과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지만,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나의 불편해하는 마음을 알아봐 주었고, 나 역시 내 생각을 피하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는 사람 모두 자기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편해진 관계가 있다 해도 필요 없는 자책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책은 모든 판단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발전하는 관계를 만드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책이 아니라 서로의 자유로운 삶을 존중하는 마음과 건강한 관계 유지를 위한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지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