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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지 칼럼] 건강한 선택<유은지 칼럼리스트> 퇴근을 넘긴 시간.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본다. 그러다 조금 전 주문한 햄버거 한입을 베어 문다. ‘일단 배라도 채우자.’는 마음으로 햄버거 조각을 씹어 삼킨다.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앞서면 손에 들고 있던 것마저 귀찮아 내려놓고 다시 모니터를 응시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식어버린 햄버거를 허겁지겁 입안으로 다시 밀어 넣고 저녁 식사를 마무리한다.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 야근에 조금이라도 빨리 퇴근하려니 결국 선택한 것은 패스트푸드였다. ‘오늘 점심은 먹었던가. 커피 한 잔으로 대신했던 것 같은데.’ 바쁜 시기가 오면 정신없이 몰아치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끼니를 놓치기도 한다. 매번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빈번해지는 이러한 패턴에 마음이 좋지는 않다. 워라밸까지는 아니어도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싶은데 여전히 일에 허덕이며 사는 직장인 같아 보여 씁쓸해진다. ‘얼마나 꽃길을 걸으려고 밥도 못 챙기며 사나.’ 싶어 서글퍼지는마음을 잠시 바라보게 된다. 식사를 햄버거로 대신했다고 해서 서글픈 것은 아니다. 필요해서 하는 일이지만 반복되는 상황과 환경 때문에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한 해를 시작하며 목표했던 한 가지는 건강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피로 회복제를 과다 복용하지 않고 신선한 음식과 걷기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새해의 시작과 동시에 많아진 업무로 식사 시간을 놓치거나, 허기를 달래는 음식들로 가득하다 보니 다짐했던 삶은 어디에도 없는 듯하다. “사람은 밥심으로 살지.”가 인생 모토인데 끼니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지금 바쁘구나. 열심히 살고 있구나.’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행동들이 습관처럼 이루어지는 것 같아 불편함이 올라온다. 시간을 아끼려 편의점 음식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날이면 음식 하나에서 오는 불만이 삶의 행복과 연결된다. 삼각 김밥을 먹으며 ‘그래서 지금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아주 근원적인 질문들로 이어진다. 하루 한 끼 그냥 대충 먹을 수도 있는 식사인데, 내 삶의 행복과 즐거움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우습기도 슬프기도 하다. 하루 일상의 작은 부분들을 놓침으로 삶의 대부분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여기는 점에 새삼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좀 더 들여다보면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바쁜 이유로 놓치는 식사일지라도 좀 더 건강한 음식을 섭취하는 방법을 찾고, 나를 챙기는 행동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람의 몸속 세포가 초당 380만 개 이상 새로 교체되며, 매일 새로 태어나고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세포조차도 초당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계속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의 식사를 반추해 보게 된다. “건강하게!”라는 선택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는데, 그것 역시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한 발 물러서 타협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왠지 모르게 다시 힘이 나는 것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다. 내일 점심에는 당근과 고구마를 먹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간단히 먹는 식사 한 끼라도 나를 위한 선택을 조금씩 늘리다 보면 삶이 보다 나은 것들로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불편한 상황에 머무는 선택보다 스스로를 위한 방향으로 건강과 만족감을 늘릴 수 있는 선택지를 고려해 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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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리키마루 사치코의 행복 씨앗】옛날 사람의 지혜<주오대학교 교수 리키마루 사치코> 양력 2월4일은 입춘(立春)이다. 전날은 당연히 겨울의 마지막 날이며 이 날이 계절을 나누기 위해 절분(節分, 세쯔분: 節=계절, 分=나누다)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그날 밤(보통 2월3일), 집 문을 열어 콩을 뿌리는 전통이 있다(마메마키). 콩을 뿌릴 때 “귀신은 밖으로 나가라, 복은 들어오라" 라고 하면서 한다. 원래 각 집에서 식구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했던 행사이지만 요즘 실제로 하는 가정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런 행사를 하는 절이나 학교도 있다. 콩 뿌리기 후에는 콩을 나이 수만큼 먹거나, 녹차 잎과 함께 콩을 넣어서 콩 맛이 있는 녹차를 복을 주는 차라고 마시는 풍습도 있다. 인터넷으로 찾아 봤더니 절분은 원래 중국에서 온 풍습이며 옛날에 한국에서도 콩 뿌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런 풍습은 사라졌던 모양이다. 문화 전파를 봤을 때 풍습이 시작된 지역이나 거기와 거리상 가까운 지역보다 오히려 먼 지역에서 옛날 풍습이 잘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그 사례를 여기서도 볼 수 있는 것 같다. 콩 뿌리기는 오랫동안 일본 전 지역에서 해 왔던 풍습이지만 절분 날에 먹는 음식으로 요즘 갑자기 유명해진 음식이 있다. 일본식 김밥이지만 먹는 방법에 특칭이 있다. 김밥을 잘리지 않고 긴 상태로 먹어야 하고, 먹는 동안 한 마디도 말하면 안 된다. 게다가 매년 길(吉)이 오는 방향이 있어 먹는 동안 그 방향을 향해야 한다. 좋은 방각은 갑(甲) · 을(乙) · 병(丙) · 정(丁) · 무(戊) · 기(己) · 경(庚) · 신(辛) · 임(壬) · 계(癸) 로 되는 십간(十干)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바탕으로 결정된다. 십간에는 각각 방위와 숫자가 할당되기에 서력을 사용하는 현대에도 서력 숫자 중 아래 한 자리 숫자를 사용해서 길 방향을 방향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김밥을 먹는 풍습은 원래 일본 서쪽 오사카 근처에서 시작된 풍습이지만 21세기 초에 슈퍼와 편의점에서 큰 광고와 함께 소개되어 일본 전 지역에 퍼졌다. 현대 일본에서는 한국과 달리 음양오행을 일상생활에서 떠올리는 장면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을 받는 풍습이 남아 있는 사실은 정말로 재미있다. 콩 뿌리며 병마를 쫓아내는 행사는 추운 겨울을 건강하게 살기 위한 옛날 사람들의 지혜였다. 의료도 다른 과학도 발달된 현대에는 필요 없는 풍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력상에 입춘 이후에는 봄이라고 해도 아직 날씨는 춥다. “귀신은 밖에 나가라, 복은 들어오라" 라고 가족의 건강을 기원했던 옛 사람들을 떠올리며 독자 분의 건강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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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리키마루 사치코의 행복 씨앗】사랑의 마음<주오대학교 교수_리키마루 사치코> “누군가가 머릿속에 떠오르면 그 분에게 안부전화를 꼭 해 보세요.” 몇 년전에 일이다. 예전에 어느 커뮤니티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친구는 한 때 동생이 자꾸 생각 났다. 하지만 동생의 생일이 다가 오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지금 일부러 연락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연락 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친구는 어머니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동생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그리고 조금 후 또 다시 전화가 와서 동생이 죽었다고 들었다. 친구는 말했다. 만약 동생이 생각 났을 때 전화를 했었으면 동생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누군가가 생각 날 때에는 그 사람에게 전화해 보라고. 지난 주말, 왠지 이 말이 수없이 떠올랐다. 사랑은 가득하지만 슬픈 내용이다. 그런 슬픔과 함께 맞이한 월요일(1월 29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 독자투고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투고를 찾았다. 투고자는 남편이 한국사람인 40대 일본 여성이다. 결혼한지 6년이 된다고 한다. 결혼했을 때 그는 한국말을 못 했다. 하지만 시아버지, 시누이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기에 답답해서 한국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한국말을 잘하게 되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몇 년동안 한국에 못 갔다. 그 후에는 혼자 사는 시아버지를 늘 걱정하면서도 집에 사정도 있기에 한국 가족 방문은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한국에서 큰 소포가 왔다. 안에 물건과 함께 한 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게다가 그 편지는 다 일본어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 편지를 읽으며 투고자는 멀리 있는 한국 가족 분들을 아주 가깝게 느꼈다고 한다. 읽은 나의 마음도 따뜻하게 해 주는 편지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은 이 투고자의 시아버지도 우리 친구도 마찬가지다. 다만 투고한 여성은 사랑을 받았고 우리 친구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것을 전하는 기회를 잃어 버렸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매일 바쁘게 살면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연락을 하지 않거나 누군가가 생각나더라도 그 사람도 바쁠까 봐 걱정해서 연락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머릿속에 떠오를 때 어쩌면 그 사람은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1월도 지나갔다. 새해 초, 한 번 연락을 했다가 그 후로 연락할 기회가 없었던 지인이나 가족은 혹시 있지 않을까? 구정을 기다리지 말고 오늘 사랑의 마음을 문자나 통화로 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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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 나를 규정하기 어려운 당신에게내가 나를 어떻게 규정하고 대하느냐에 따라 세상 사람들 역시 같은 수준으로 당신을 대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나를 어떻게 규정하고 대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살아가면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내가 어떤 선택으로 내 인생을 이끌어갈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 순간에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수많은 선택의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정의한 ‘나’라는 사람의 에너지를 세상에 내보내고 세상은 그 에너지에 반응하는 것이다. 한때 나는 겉으로 드러난 나를 규정하기에 조급했던 적이 있었다. 세상이 나를 이런 모습으로 생각해주면 좋겠다는 욕구가 한창 들끓었던 시절, 개인 브랜딩 컨설팅을 하는 지인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었다. 삶의 경험과 공부를 녹여내 “마음을 치유하는 사람.”, 투자 경험을 살려 “초보 경제 강사” 등등 듣기만 해도 근사한 내가 만들어졌지만 결국은 어느 것도 나로 규정하지 않고 끝냈던 기억이 난다. 에밀리 디킨슨의 “우리는 우리가 믿는 대로 생각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며, 우리가 행동하는 대로 살아간다.”라는 명언처럼 지금 현재 조금 부족하더라도 이미 그런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자기계발 분야에서의믿음이다. 그리고 내가 규정하고 믿는 크기만큼 세상도 그렇게 나를 대우해 준다는 것이다. 그때 왜 그렇게 주저했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었다. 내가 먼저 나를 그 사람으로 바라봐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고 그 불안한 모습은 그대로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어찌 보면 나는 지금 너무 부족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내보냈고 세상도 나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으로 대우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여전히 ‘나는 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약간의 거부감이 생긴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나처럼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말하고 싶다. 무엇이라 규정하든 중요한 것은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어떠한 ‘나’라도 지지해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면 그 어떤 ‘나’일지라도 세상에 나아갈 수 있다. 그럼 세상은 나에게 답해 줄 것이다.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답이 어렵다 해도 괜찮다. 나의 마음이 아직 그 길을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그 길을 가고 있지 않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무언가를 향해 가고 있다. 지금 당장 서둘러 나를 정의하고 세상과 싸우지 않아도 우리가 그 길을 갈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 된다. 그리고 세상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보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나를 사랑하고 자신을 귀히 대접한다면 세상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상처받지 않는다. 세상은 당신이 선택한 인생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정의할 것이며 세상은 당신의 선택을 지지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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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지 칼럼] 내가 나를 대하는 법늦은 오후, 커피 향기가 책갈피 사이로 스며드는 시간, 책의 한 문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늘 하루, 당신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였는가.” 하루 동안 어떤 말을 나에게 주로 했었는지 떠올리다 흠칫하고 놀라고 말았다. 최근 나에게 말을 건네는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주로 내뱉었던 혼잣말들은 긍정적인 언어보다 부정적인 의미를 더 많이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표현이 많았다는 것은 나를 소홀하게 대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동일시되면서 마음 한편이 불편해졌다. 며칠 전, 직원들 앞에서 1년 계획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발표의 마지막에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마무리하고 돌아서는데 ‘아차.’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폐가 되지 않도록... 나는 폐가 되는 사람이었던가.’ 평소였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문장이지만 유달리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내가 나를 표현하는 언어 같아서 맘이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겸손하겠다. 열심히 하겠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폐가 되지 않겠다.라는 말은 스스로를 낮추는 습관적인 표현방식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표현된 나에 대한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그 한 문장으로 인하여 나는 폐를 끼치는 사람.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생각이 스치자, 자신을 대하는 법,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순간이지만 나를 어떻게 표현하고 나타내느냐에 따라 상대가 기억하는 나는 달라질 것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 여기며, 불편함을 감수했을 것이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나를 낮추는 패턴의 행동 습관들을 새삼 돌이켜보게 되는 것은 타인이 중요한 만큼 나도 중요해졌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만큼이나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중요한데 그동안은 크게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존중하고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을 때, 상대 또한 나의 태도를 닮아가는 게 아닐까.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타인이 나를 대하는 모습 또한 달라질 것이다. 오랜 시간 길들여진 패턴이라 쉽게 변화되긴 힘들지도 모르지만, 무의식적인 반응을 변화시키기 위해 작은 노력을 하고자 마음먹었다. 나를 긍정적으로 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셀프 토크(자기와의 대화)이다. 흔히 툭 내뱉은 혼잣말에도 나를 인정하고 위로하는 말을 자주 건네는 것이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말보다 칭찬과 감사를 표현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행동을 의식적으로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를 높이는 패턴으로 변화되지 않을까 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의 진리처럼 자신에게 긍정적인 언어와 행동을 반복적으로 한다면, 타인도 스스로도 나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기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면, 긍정의 언어와 표현으로 자신을 대해주었으면 좋겠다. 자신을 낮춤으로 상대를 높이기보다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유은지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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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리스트의 '행복이 그냥 지나가게 두지 말기를'행복이 그냥 지나가게 두지 말기를... 엄마는 따뜻하게 데워진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나른한 표정으로 TV를 본다. 그 옆에 있는 아이는 소파에 걸터앉아, 처음 하는 뜨개질의 재미에 빠져 연신 손이 왔다 갔다 하느라 바쁘다. 그리고 아빠는 그런 아이의 앞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의 조그만 발톱을 정리해 주고 있다. 아빠의 투박하고 큰 손이 저리 섬세하게 느껴지는 건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아이와 남편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다 문득, ‘지금, 이 순간이 행복이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 평범한 가정의 휴일 풍경이겠지만, 그 시간에 집안의 공기는 한없이 편안한 온기가 흐르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엇도 의식하지 않은 몸놀림과 맥락 없는 대화를 하며 이따금 웃음이 터진다. 이 알 수 없는 충만한 느낌, 이것이 행복이 아니면 무엇일까? 지금, 당신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혹시 당신이 놓치고 있는 행복한 순간이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의 문을 열고 살펴보는 여유를 가지면 좋겠다. 평범한 휴일의 한때가 이런 꽉 찬 느낌으로 나를 채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안의 행복 인자가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행복한 순간의 느낌을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 추억의 만화 <곰돌이 푸>의 삽화와 메시지를 담은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라는 책이 출간되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행복의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책에서 우리의 행복 메신저 푸는 말한다. “아직 찾아오지 않은 행복을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는 지금의 행복을 충분히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라고 말이다. 우리는 항상 행복은 가까이에 있음을 말하지만 멀리서 찾느라 여념이 없다. 행복은 내 마음자리 안에 있음을 배우지만 나의 마음은 늘 타인에게서 행복을 확인하려고 한다. 행복은 외부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곳, 내 마음 안에 있다. 행복은 다른 어느 곳에서 찾아오는 것도 누군가에게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 안에서 스스로 발견하고 느껴야만 하는 것이다. 행복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알아봐 주려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더 자주 그 순간을 느끼고 즐기는 사람이 결국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빠와 아이가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별로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에도 까르르 넘어가는 오늘의 풍경이 내일이면, 아이가 아빠한테 혼이 나고 있거나, 이해할 수 없는 투정과 짜증으로 엄마의 속을 헤집어 놓는 반전 드라마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마주해야 하는 일상이 평화롭지 않더라도, 내일을 미리 걱정하며 오늘의 행복을 그냥 지나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이 행복은 없다. 또 다른 행복이 오겠지만 지금의 이 행복한 느낌을 놓치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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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지 칼럼리스트의 '우리 삶의 마디'유은지. 우리 삶의 마디. < 유은지 칼럼리스트 > 주말 오후, 지인들과 대나무로 유명하다는 아홉산 숲을 찾았다. 장소를 옮기며 걸을 때마다 사락사락. 바람결에 들려오는 대나무 잎 소리는 처마 끝 풍경 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빼곡하게 줄지어 선 대나무 숲에 들어가니 대나무 향에 코끝이 상쾌해진다. 사계절 내내 녹색으로 푸른 대나무는 식물들이 자신의 색을 잃어버리는 겨울이 될수록 푸르름이 더욱 빛을 발하는 듯하다. 고산 윤선도는 <오우가>에서 대나무를 풀도, 나무도 아니라고 말했는데, 일반적인 나무와는 달리 대나무에는 나이테 대신 마디들이 있다. 대나무는 나무가 아닌 풀과 식물에 속한다는 사실을 설명서를 통해 알고는 ‘풀이 이렇게 높이 자랄 수 있다니.’하며 더 경이롭게 올려다보았다. 대나무는 땅 밑에서 4~5년간 수십 미터까지 뿌리를 내리는데, 오랜 시간 뿌리들이 서로를 견고하게 다지며 깊숙이 자란다고 한다. 땅 밑 뿌리 내린 대나무가 어디까지 높이 뻗어 올라가는지를 넋을 놓고 올려다보다 대나무에 새겨진 마디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디는 대나무가 부러지지 않고 더 높이 성장하도록 지지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비바람에 흔들려 부러질 수도 있는데 마디가 있기 때문에 쉽게 쓰러지지 않고 더 높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길게 뻗어가기 위해 마디를 두어 잠시 멈추고, 다시 자라나는 대나무는 포기를 모르는 것 같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대나무는 우리에게 강인함의 상징으로 여전히 기억되나보다. 우리의 삶에도 대나무의 마디가 필요한 시기가 있다. 한참 성공과 성장에 집중하다 보면 번아웃으로 잠시 내려놓아야 하는 때가 오기도 한다. 그리고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알아봐 주지 않아도 나를 단련해야 하는 시기가 있다. 조금 느리더라도 스스로를 다지고,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이다. 나아감이 힘들 때, 대나무가 오랜 시간 마디를 만들며 살아낸 모습을 기억해도 좋겠다. 무수히 많은 대나무들이 바람결을 따라 흔들린다. 조용한 가운데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대나무를 보고 있자니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은 듯하다 삶은 계속해서 나아가는 과정이다. 뿌리를 내리는 데에도, 성장하는 가운데에도, 그리고 성장한 후에도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쌓아온 것들을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고, 성장하기를 잠시 내려놓고 쉬어가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러한 삶의 마디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삶에도 잠시 멈춤의 마디가 있음을 인정하면, 그 과정을 조금은 견뎌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차올랐다. 물러서기를 선택하기보다 대나무의 마디를 기억하면서 잠시 멈추어 준비하고, 다시 나아가는 오늘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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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리키마루 사치코의 행복 씨앗】 한일 여성과 이공계 교육【리키마루 사치코의 행복 씨앗】 한일 여성과 이공계 교육 < 주오대학교 교수 리키마루 사치코 > 남녀 사이에는 여전히 다양한 문제가 있다. 집안일부담이나 대학 진학률, 임금 격차 등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많다.특히 대학 진학률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이공계 학부 진학률이다.이공계 분야는 기존에 남성의 영역으로 인식되어 남성에 비해 여성은 수학을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이 낮은 진학률을 정당화하는 근거였다. 이런 편견에 대해서는 한국에서도 지금까지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었다.그러나 201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한국 여학생의 이공계 진학률은 21%로 OECD 국가 평균인 15%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보였다. 한국이 디지털 강국이라는 점, 또 WISET(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이나 K걸스데이 등의 노력으로 여성에게도 이공계 분야가 자신의 활약의 장소로서 이전보다 매력적인 분야가 되어 온 것 같다. 반면에 일본은 같은 OECD의 조사로 여학생의 이공계 진학률은 7%에 불과했다고 나왔다.이에 따라 올해 대학입시에서 14곳의 국공립대가 이공계 학부에 여성할당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해에는 5곳의 대학밖에 없었지만 올해는 3배 가까이 늘었다. 여성할당제를 도입해 학생들 사이의 성별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고, 또 학습환경 다양화 및 사회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대학 측 의도다. 게다가 산업계에 있어서도 여성 기술자 채용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 같은 대학 및 산업계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여성할당제를 채용하면 남녀차별을 조장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우려도 나온다.남녀 간 차이가 차별로 바뀌는 순간이다. 미국에서는 1960~70년대 대학에서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소수자 계층에 속하는 지원자를 우선 선발한 '적극적 차별 시정 정책(Affirmative Action)'을 도입했다. 이 제도는 흑인과 유색인종을 주로 대상으로 하며 미국 연방정부가 먼저 기업에 권장한 것을 계기로 대학이나 대학원 입학 선별 때도 채용되기 시작한 제도다.그러니 직접 남녀 간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은 아니다. 하지만 일정 수험생에게 다른 입학기준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보면 비슷한 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미국 연방대법원은 2023년 6월 29일 각 주의 법률은 흑인에게도 백인에게도 평등해야 하며 유색인종이든 백인이든 모든 사람이 법적으로 평등해야 한다고 규정한 미국 헌법 수정 제14조를 근거로 이 같은 정책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그 배경에는 1978년 이후 대학에 불합격한 백인 남성이 소수자 우대정책을 채택한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움직임이 여러 대학을 상대로 수차례 이뤄졌다는 사정이 깔려 있다.일정 범주에 속하는 사람을 우대해 실질적 평등을 도모하는 방식에 종지부를 찍은 미국의 상황을 보더라도 여성할당제의 미래는 밝다고 보기 어렵다는 인상을 받는다. 일본에서는 현재까지 불합격한 남성이 소송 제기한 사례는 없다. 하지만 올해 14곳의 대학이 여성할당제를 도입해,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점을 감안하면 양성평등 관점에서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또 일본에서는 여성이 이공계 진학에 소극적인 이유로 "여성은 애교가 중요하고 지성은 다소 낮아도 귀여우면 된다"는 일본 특유의 여성관도 그 배경에 있는 것 같다. 지성적인 여성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는 남성이 자기 우위를 유지하고 싶은 욕구, 남성 눈높이가 어른거린다. 한국에서는 이공계 분야에서 민간 여성 연구자의 비율도 최근 10년가량 증가세다.여성 연구자수가 많아짐에 따라 여학생도 자신의 롤모델을 찾기 쉬워졌다고도 할 수 있다.그러나 한편으로 2022년에 발표된 WISET 2020년 여성과 학생력 활용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민간기업 연구기관의 여성 취업자가 전체 여성 과학기술 인력의 53.1%를 차지하고 있지만 2020년도 여성 과학기술 인력의 신규 채용 비율은 20.9%, 취업 비율 16.3%, 직급(관리직) 비율 9.4%에 그치는 등 현실은 그리 밝지 않다. 일본 대학들이 도입한 여성할당제가 효과가 있을지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그렇지만, 이러한 잔꾀의 대응만이 아니라, 여성이 이공계 분야에 진정한 관심을 갖게 되는 교육이 필요하다. 또 한일 양국에서 그 교육 결과를 살릴 수 있는 직장의 존재도 필요할 것이다.게다가 일본에서는 여성의 인식에 관한 사회문화적 요인을 없애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그런 뜻으로 여성의 이공계 교육에 관해 한일이 서로 배우는 것은 양국의 미래에 큰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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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리스트 '당신을 지켜주는 그 무엇을 믿는가?'당신을 지켜주는 그 무엇을 믿는가? 당신은 그런 적이 없었는가? 살다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아득한 느낌! 끝이 없을 것 같은 절망 앞에서, 우린 세상의 모든 신을 간절히 찾게 되는 때가 있다. 종교적 의미의 신, 마음속에 존재하는 나만의 신, 우주에 존재하는 무엇이라 이름 불러도 좋은 그런 존재 말이다. 어떤 신성한 존재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간절한 믿음이 필요한 순간이 있지 않은가? 천국에서 신을 만난 한 사내의 이야기가 있다. 신이 그가 걸어온 한평생을 보여주었다. 그의 곁에는 늘 함께 걸어온 신의 발자국이 나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는 발자국이 한 사람의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신을 향해 원망스럽게 따졌다. “제가 가장 어려웠을 때 당신은 날 버렸군요.!” 그러자 신이 대답했다. “오해 마라. 그건 네 발자국이 아니란다. 난 널 안고 있었지.” -리얼리티 트랜서핑, 바딤 젤란드 “그건 네 발자국이 아니란다. 난 널 안고 있었지.” 코끝이 찡해졌다. 세상 어떤 사랑 고백보다도 가슴 터질 것 같이 황홀하지 않은가? <사진출처: 픽사베이> 당신은 자신을 지켜주는 신이 있다고 믿는가? 신이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수호신이라 불러도 좋고, 보이지 않는 우주의 힘이 있어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해도 상관이 없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 항상 나를 지켜주는 어떤 존재를 믿는 삶이었다. 삶이 힘들고 이것이 끝인가 생각했던 순간에도 더는 나빠지지 않았음에 안도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은 비껴간다는 확신은 나를 지켜주는 것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 신성한 존재에 대한 믿음이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는 설명할 수가 없다.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설명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존재에 대한 믿음인지, 믿음에 대한 믿음인지 어쨌든 매 순간 신은 함께 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의 확인은 감사일기를 쓰는 순간일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한 적도 없지만, 제일 먼저 우리 가족의 하루를 지켜주심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시간은 나만의 수호신에게 온전히 귀를 열고 삶의 겸허함을 배우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바딤 젤란드의 <리얼리티 트랜서핑>에서는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수호천사가 존재하고 있고, 그 존재가 우리를 사랑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우리를 돌봐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한다. 나를 지켜주는 신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는 개인의 선택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순간이 있다. 삶이 항상 평탄하길 바라지만 희망 사항일 뿐이다. 당신은 누구에게 의지하는가? 온전히 당신을 위해 자신을 다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나를 지켜주는 신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 마치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무엇이라도 나를 지켜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세상 모든 것이 나를 향한 호의를 거둘 때, 우리를 안고 그 시간을 건너 줄 존재가 있다는 믿음만으로도 따뜻해지고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아는가? 지금도 그 신이 우리를 안고 강을 건너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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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지의 관계학교 '관계는 안정적인 애착에서''관계는 안정적인 애착에서' <유은지 칼럼리스트> 삶에서 겪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관계의 어려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 관계를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애착’이라는 단어를 마주하게 된다. 최근 방송에서 만나는 수많은 금쪽이의 이야기를 보아도 아이나 성인. 누구나 할 것 없이 안정적인 애착이 인간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알 수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양육자와의 관계를 우리는 애착이라고 하며 그 관계를 안정적이고 긍정적으로 형성하는 것은 중요하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인형이나, 베게 등 애착을 가졌던 물건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부모님과 떨어져 있던 순간에는 강아지 인형을 늘 안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의 장난감을 수집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과정에서 과거를 추억하고, 자기만족과 심리적 안정감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애착과 관련하여 유명한 실험이 있는데 Harry Harlow의 아기 원숭이 실험이다. 이 실험은 아기 원숭이에게 철사로 만든 대리모를 통해 우유를 먹게 하는 것이었다. 동물보호라는 관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 실험으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지만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아기 원숭이들은 철사로 된 대리모보다 천으로 된 대리모에게 안정감을 더 느끼고 오랜 시간 머물렀다는 것이다. 철사로만 되어 있는 대리모와 함께 했던 아기 원숭이들은 어른이 된 후 다른 원숭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고 시간이 지나도 사회성이 형성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실험은 물질적 보상보다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접촉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한 사례이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관계의 패턴을 만드는데 많은 영향을 미치는 애착은 우리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하기 때문에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주제이지 싶다. 자신과 부모, 그리고 자녀, 나아가 직장동료, 연인, 친구 등 삶에서 중요한 대상과의 관계에서 애착은 기본적인 심리 요소가 된다.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해 왔다면, 관계에 대한 만족과 안정감을 경험하고 갈등이나 문제 상황에서도 해결해 나갈 힘을 가진다. 하지만 불안정 애착형성이 주를 이루었다면, 관계를 형성하는데 불안, 어려움이 겪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애착을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에 안정적인 애착과 불안정한 애착 중 무엇이 좋고 나쁘다.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혼자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므로 안정적인 애착형성을 통해 관계의 질을 높이는 노력은 필요하다.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괜찮았던 점을 발견해 보고, 자신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집중해 보는 것 등 소소한 일상에서 경험하면 좋겠다. 한 해를 시작하는 지점에서 건강한 관계 맺기를 위해 작은 부분이라도 스스로 노력해 보면 어떨까 한다.